진단명을 찾지 못한 환자들, 진단 방랑의 현실
- 유재국 (로뎀요양병원 병원장, 신경과 전문의)
- 8월 13일
- 3분 분량
얼마 전 진료실에 걸음이 불안정하고 손끝이 저릿하다는 증상을 몇 년째 안고 있으면서도 정확한 병명을 듣지 못했다는 환자를 만났다. 여러 대학병원을 거쳤지만 검사마다 '이상 소견 없음'이나 '경과 관찰'이라는 답만 돌아왔다고 했다. 이런 사례를 마주할 때마다, 병명이 없다는 것이 곧 병이 없다는 뜻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병명 없는 병, 얼마나 흔한가
희귀질환은 법적으로 유병인구가 2만 명 이하이거나, 진단이 어려워 유병인구조차 파악되지 않는 질환으로 정의된다. 이 가운데 80% 이상이 유전적이거나 선천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다. 신경과 진료 현장에서 마주치는 원인 불명의 운동실조, 근력저하, 원인불명 뇌전증, 발달지연 등이 이 범주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국내 국가관리대상 희귀질환 지정 건수는 2018년 926개에서 2024년 1,314개로 매년 늘어왔다. 그만큼 새롭게 이름이 붙는 질환도 많아지고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이전까지는 이름조차 없던 병을 앓고 있던 환자가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진단 방랑,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
'진단 방랑(diagnostic odyssey)'이라는 용어는 정확한 진단을 받기까지 환자와 가족이 겪는 길고 힘든 여정을 가리킨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평균 4~6년, 국내 보건당국이 인용한 자료에서는 평균 7.6년이 걸린다고 알려져 있다. 이 수치는 희귀질환 전체를 평균 낸 값이며, 질환에 따라 개인차가 크다는 점은 짚어둘 필요가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중간에 오진이 끼어드는 경우다. 오진을 거친 뒤 올바른 진단에 도달한 환자는 평균 19년이 걸린 반면, 오진 없이 진단받은 경우는 평균 8년이 걸렸다는 보고가 있다. 잘못된 진단명 하나가 환자의 시간을 두 배 이상 늦출 수 있다는 뜻이다.
임상 메모. 여러 전문분야를 거치며 서로 다른 소견을 듣고, 기관마다 소통이 끊기면서 검사가 중복되거나 치료 방향이 엇갈리는 경우를 진료 현장에서 자주 목격한다. 환자 입장에서는 병을 앓는 것 이상으로 지치는 과정이다.
기존 제도의 한계
국내 의료 체계는 아직 미진단 환자에 대한 별도의 인식이나 전담 전문가 개념이 뚜렷이 자리잡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 환자는 진단을 찾기 위해 여러 병원을 스스로 돌아다니는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제도적으로도 진단명이 확정되어야 지원이 시작되는 구조가 걸림돌이 된다. 건강보험 산정특례 제도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일반 희귀난치성질환자: 등록일로부터 5년간 해당 상병으로 진료 지원
상세불명 희귀질환자: 등록일로부터 1년간, 그것도 해당 임상 소견으로 진료받은 경우에 한해 지원
즉 병명이 불확실할수록 오히려 혜택이 제한적인 구조다. 여기에 현재 의료 기술의 한계로 미진단 희귀질환의 60~70% 정도는 여전히 병명을 찾지 못한 채 남는다는 점도 냉정하게 짚어야 할 현실이다.
새로운 접근 — 진단지원사업과 기술 발전
이런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질병관리청은 2018년부터 「희귀질환 진단지원사업」을 시행해 왔다. 정확한 병명을 알 수 없어 치료 연계가 어려웠던 환자에게 유전자 검사와 해석을 지원하고, 진단 후에는 산정특례 등 의료서비스로 연결해 주는 사업이다.
2025년 「찾아가는 희귀질환 진단지원사업」은 지원 규모 800명, 대상 질환 1,314개, 참여 의료기관 34개로 전년보다 확대되었다. 직전 연도인 2024년 사업 결과를 보면 지원 환자 410명 중 129명(31.5%)이 실제로 진단을 확정받았고, 그중 80.6%는 소아·청소년 환자였다. 의료진과 환자·가족의 만족도도 각각 97%, 98%로 높게 나타났다.
기술적으로도 변화가 빠르다. 전장유전체 분석과 롱리드 시퀀싱 같은 기법이 발전하면서, 기존 검사로는 찾지 못했던 원인 유전자를 새롭게 발견하는 사례가 국제 학술대회에서 보고되고 있다. 미국 밴더빌트대의 미진단질환네트워크(UDN)에서는 AI 도구가 기존에 진단명을 찾지 못했던 사례의 원인을 찾아낸 연구 결과가 2025년 발표되기도 했다. 다만 이런 기술들은 아직 연구·초기 도입 단계인 만큼, 모든 환자가 곧 진단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는 시기상조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챙길 수 있나
진료 현장에서 원인 불명의 신경계 증상을 오래 앓고 있는 환자를 만나면, 질병관리청의 진단지원사업 연계를 안내하는 것이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이 사업은 환자가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고도 유전자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접근성이 낮은 지방 환자에게도 유용하다.
진단이 확정되면 산정특례와 희귀질환자 의료비 지원 사업으로 이어져 의료비 부담이 줄어든다. 또한 유전성 질환으로 확인될 경우 부모나 형제 등 가족 3인 내외에 대한 유전자 검사도 함께 지원받을 수 있어, 환자 한 명을 넘어 가족 단위의 예방적 관리가 가능해진다는 점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다만 이 사업은 예산이 정해져 있어 지원 규모(연 800명 내외)가 채워지면 실제 신청 가능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증상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면 신청 시점을 미루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임상적 의미와 남은 과제
국제희귀질환연구컨소시엄(IRDiRC)은 의심되는 희귀질환을 가진 환자가 이미 알려진 질환이라면 내원 후 1년 이내에 진단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제시한 바 있다. 이 목표는 아직 국내외 모두에서 완전히 달성되지 않았지만, 진단지원사업과 유전자 분석 기술의 발전은 그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상세불명 희귀질환에 대한 산정특례 1년 제한 같은 제도적 허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병명을 찾지 못한 환자일수록 오히려 지원에서 소외되는 구조는, 앞으로 정책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다.
맺으며 — 병명이 없어도 돌봄은 계속된다
병명을 찾는 여정이 길어지더라도, 그 사이 환자와 가족이 감당해야 할 일상은 멈추지 않는다. 근력이 약해지고 균형을 잡기 힘들어지는 증상이 진행되는 동안, 재활과 돌봄은 진단명과 별개로 필요하다. 로뎀요양병원은 정확한 병명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환자라도, 현재 나타나는 증상과 기능 변화를 기준으로 재활 계획을 세우고 가족과 함께 상황을 지켜보는 방식으로 돌봄을 이어간다. 병명을 찾는 긴 여정 속에서도 환자의 일상과 존엄이 지켜질 수 있도록, 옆에서 함께 걸어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 본 콘텐츠는 의학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며, 개별 진단·치료를 대체하지 않습니다.
로뎀요양병원 안내
이 글은 인천 미추홀구 로뎀요양병원 병원장 유재국(신경과 전문의)이 작성했습니다. 루게릭병(ALS), 파킨슨병, 뇌졸중 등 뇌신경계 질환과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재활을 함께 관리합니다. 진료 안내는 로뎀요양병원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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