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저릿하다면, 혈액순환 탓만은 아닐 수 있다
- 유재국 (로뎀요양병원 병원장, 신경과 전문의)
- 8월 13일
- 3분 분량
최근 진료실에서 "발이 저려서 혈액순환제를 먹는데도 낫지 않는다"는 환자를 잇달아 만났다. 발저림은 단순한 순환 문제로 오해받기 쉽지만, 실제로는 말초신경병증이라는 별개의 질환에서 시작된 신호일 수 있다. 저림이 오래가거나 점점 심해진다면 신경 자체의 문제를 의심해봐야 한다.
발끝 저림, 왜 순환 문제로만 오해할까
말초신경은 척추뼈 사이 작은 구멍을 통해 뼈 밖으로 나와 팔, 다리, 몸통까지 온몸에 넓게 뻗어 있다. 이 신경은 운동, 감각, 자율신경 세 가지 역할을 나눠 맡고 있어서 어느 부분이 손상되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증상도 다르다. 말초신경병증은 이 신경이 좌우 대칭적으로 손상되면서 저림, 감각 저하, 힘 빠짐 등이 나타나는 질환이다.
대부분 발끝부터 저리기 시작하기 때문에 환자들은 이를 혈액순환이 나빠진 것으로 생각하고 넘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저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해지는 진행성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단순 순환 문제와 차이가 있다. 손상 범위에 따라 하나의 신경만 눌리는 손목터널증후군 같은 단일신경병과, 여러 신경이 동시에 손상되는 다발신경병으로 나뉘는데, 당뇨병성 신경병증이 다발신경병의 대표적인 예다.
증상만으로는 원인을 가늠하기 어렵다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만으로는 원인이나 중증도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 한쪽 신경만 손상된 경우에는 뇌졸중과 증상이 비슷해 혼동되기 쉬워, 정밀검사 없이는 정확한 구별이 힘들다. 그래서 저림이 지속되거나 심해진다면 반드시 신경과를 찾아 정확한 진단을 받아야 한다.
정밀검사를 거쳐도 원인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도 짚어야 한다. 병력 청취와 신경계 진찰에 이어 신경근전도검사, 자율신경검사, 신경초음파검사로 손상 부위를 파악하고 혈액·소변검사로 원인을 찾아가지만, 약 25%의 환자에서는 원인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임상 증상과 병력을 토대로 치료 방향을 정하게 된다. '검사만 받으면 원인이 다 나온다'는 기대는 현실과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임상 메모. 검사실 채혈은 환자들이 잘 받아들이지만, 다소 불편할 수 있는 근전도 검사는 요청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근전도는 신경 손상이 축삭형인지 탈수초형인지 구분하는 데 필수적인 검사이므로, 불편하더라도 필요한 경우 적극적으로 받는 것이 진단에 도움이 된다.
대칭성이냐 편측성이냐, 여기서 갈린다
임상적으로 가장 중요한 구분은 저림이 양쪽에서 대칭적으로 나타나는지, 아니면 한쪽으로 치우쳐 나타나는지다.
양쪽 발끝에서 시작해 서서히 진행하는 저림 — 다발신경병증 가능성, 신경과 진료 고려
한쪽으로 치우친 저림에 두통·어지럼·팔다리 힘빠짐 동반 — 뇌졸중 등 응급질환 감별이 우선
대칭적 저림이 근위부까지 진행하며 8주 이상 지속 — 만성염증성탈수초성다발신경병증(CIDP) 등 면역 매개 질환 의심
뇌졸중은 갑자기 발생하며 한쪽 편측에서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인 반면, 다발신경병증은 양쪽에서 서서히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차이를 알아두는 것만으로도 응급 상황과 만성 질환을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원인에 따라 치료의 방향이 달라진다
말초신경병증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가장 흔한 것은 당뇨병이고, 알코올이나 항암제 같은 독성물질 노출, 자가면역질환, 유전자 돌연변이도 원인이 될 수 있다. 신경이 눌리거나 다치는 경우, 종양, 샤르코-마리-투스병 같은 유전 질환, 신장·간 질환이나 갑상선 기능저하증 같은 대사성 질환도 신경 손상을 유발할 수 있다. 원인이 다양한 만큼 특정 환자의 신경병증 원인을 밝히는 일이 임상의에게도 쉽지 않은 과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원인이 무엇이냐에 따라 치료 가능성도 크게 달라진다. 당뇨병성 신경병증이라면 혈당 관리가 핵심이 되고, CIDP처럼 면역이 관여하는 신경병증은 치료가 가능한 질환으로 분류되어 있어 조기에 진단할수록 실제 치료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반면 원인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 특발성 말초신경증으로 남는 경우도 있다는 점은 환자와 가족 모두 미리 알아두는 편이 좋다.
확진되면 살펴봐야 할 것 — 산정특례
샤르코-마리-투스병이나 CIDP처럼 유전성 또는 면역성 말초신경병증으로 확진되는 경우, 국내에서는 희귀질환 산정특례 제도를 통해 진료비 부담을 낮출 수 있다. 희귀난치성질환자로 등록하면 외래·입원 진료 시 요양급여비용총액의 10%만 본인이 부담하게 되며, 등록일로부터 5년간 해당 상병에 대해 적용받는다. 다만 등록기준이나 세부 적용 항목은 건강보험공단 고시에 따라 주기적으로 바뀔 수 있으므로, 진단이 확정되면 담당 의료진, 필요하다면 질병관리청 희귀질환 헬프라인을 통해 최신 기준을 확인해보는 것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
진료실에서 드리고 싶은 말
발저림을 그저 나이 탓, 혈액순환 탓으로만 넘기고 지나가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하지만 저림이 오래가거나 점점 심해진다면, 그 밑에 놓인 신경의 신호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검사를 거쳐도 모든 원인이 다 밝혀지는 것은 아니지만, 단계적으로 접근해가는 과정 자체가 불필요한 걱정을 줄이고 관리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로뎀요양병원에서도 저림이나 감각 이상을 호소하는 어르신들을 꾸준히 만난다. 진단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라도 증상 변화를 세심히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환자 개개인의 상태에 맞춰 관리 방향을 조정해나가고 있다. 발끝의 작은 저림 하나도 놓치지 않고 함께 살펴보는 것, 그것이 회복의 시작이라고 믿는다.
※ 본 콘텐츠는 의학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며, 개별 진단·치료를 대체하지 않습니다.
로뎀요양병원 안내
이 글은 인천 미추홀구 로뎀요양병원 병원장 유재국(신경과 전문의)이 작성했습니다. 루게릭병(ALS), 파킨슨병, 뇌졸중 등 뇌신경계 질환과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재활을 함께 관리합니다. 진료 안내는 로뎀요양병원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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